시원한 바닷바람과 비릿한 바다 내음이 코끝을 스친다. 부두를 가득 메운 어선과 싱싱한 해산물을 사고파는 어판장의 사람들, 보령 근해로 섬 여행을 떠나려는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활기차고 정겨운 어촌 풍경을 지닌 충청남도 보령의 첫인사다.
깨끗한 바다와 아름다운 일몰, 풍부한 해산물의 집산지로 알려진 보령은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삼국시대부터 백제가 다른 나라와 교역하기 위한 교두보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세곡(稅穀)을 실은 배가 한양으로 가는 지름길로 서해안 중심에 위치해 예부터 해상 교통의 요충지로 꼽혀왔다. 또한, 서해안의 최전선으로 왜구로부터 충청도 해안을 방어하고 나라를 지켰던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곳이다.
이제껏 보령을 떠올렸을 때 ‘머드축제’만 생각났다면 아직 보령의 진면목을 알지 못한 것이다. 바다 산책길 죽도 상화원과 대천항, 조선시대 서해안의 안보를 지켰던 충청수영성과 대한민국의 에너지 안보를 책임지고 있는 보령LNG터미널까지 보령의 새로운 모습들을 속속들이 들여다봤다.
서해 바다를 품은 비밀의 정원 ‘죽도 상화원’
용두해수욕장과 대천해수욕장을 잇는 남포방조제 길을 차로 5분 정도 달려 ‘죽도 상화원’에 도착했다. ‘상화원’은 천혜의 섬 죽도의 자연미를 그대로 살려 섬 전체를 하나의 정원으로 만든 곳이다.
입구에 들어서자 고풍스러운 한옥 건물이 눈길을 끈다. 고려 후기 경기도 화성 관아에서 연회를 베풀던 정자를 복원한 의곡당이다. 그 옆으로 섬 전체를 한 바퀴 돌며 산책할 수 있는 지붕형 회랑(回廊)이 있다. 덕분에 비나 눈이 와도 여유롭게 섬을 구경할 수 있다. 고풍스러운 기와지붕과 호젓한 해송(海宋)을 보며 산책로를 거닐다 보니 복잡했던 상념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평온한 마음만 남는 듯하다.
상화원 내 의곡당 전경
상화원의 산책로 회랑
상화원 한옥마을과 바다
활기 넘치는 바다의 풍경 ‘대천해수욕장’과 ‘대천항’
죽도 상화원을 나와 다시 남포방조제 길을 따라 대천항 방향으로 가다 보면 그 끝에 서해답지 않은 드넓은 백사장과 푸른 바다가 펼쳐진 대천해수욕장이 있다. 매년 여름이면 ‘보령머드축제’를 즐기려는 국내외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어지는 곳이다. 조개껍데기가 오랜 세월에 거쳐 잘게 부서져 모래로 변한 백사장을 천천히 걸어봤다. 새하얀 모래사장과 탁 트인 바다에 가슴이 시원해지고, 신나게 물놀이하는 가족들을 보니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번진다.
이제 대천항을 가볼 차례다. 대천항은 서해안 최대 규모의 수산물 시장으로 사시사철 맑은 청정 수역에서 나오는 다양한 종류의 해산물을 만날 수 있다. 때마침 부두에 정박한 어선들 사이로 해산물을 잔뜩 실은 배가 항으로 들어왔다. 만선의 기쁨을 안고 상자 가득 물고기를 실어 분주하게 나르는 어민들의 발걸음에서 바다의 푸른 에너지가 느껴지는 듯하다. 부두 한편에 있는 어판장은 이제 막 들여온 해산물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보령 특산물인 꽃게와 갑오징어가 제철을 맞아 바구니에 가득하다. 산지에서 갓 잡은 해산물을 맛보는 것도 바다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대천해수욕장 전경
대천해수욕장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
대천항 수산시장의 해산물
대천항에 정박되어 있는 어선들
조선시대, 서해로 침략하는 왜구를 막아냈던 해안방어 요충지 ‘충청수영성’
서해에 왔다면 빼놓을 수 없는 낙조를 보기 위해 부지런히 ‘충청수영성’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천항’에 있어 오천성이라고도 불리는 충청수영성은 조선시대인 1509년(중종 4년) 충청수군절도사 이장생(李長生)이 서해로 침입하는 왜구로부터 조선을 지키기 위해 해안선을 따라 구릉성 산지에 돌을 높이 쌓아 올린 석성(石城)이다.
충청수영성은 한양으로 가는 선박을 보호하고 왜구 침탈을 방지하는 등 충청도 해안을 방어하는 최고 사령부 역할을 한 곳이다.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충청수영과 그 산하에 배속된 군선이 142척, 수군은 8,414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꽤 큰 규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도 이곳에 정박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중요한 해안방어의 요충지였다.
동서남북 4곳에 있던 성문 중 유일하게 남은 서문(‘망화문’이라고도 함)을 지나 성곽을 따라 올라갔다. 성곽 끝에는 다산 정약용, 이항복 등 조선시대 세도가와 문인들이 아름다움을 극찬하며 찾아와 시문을 남긴 정자 영보정(永保亭)이 자리하고 있다. 영원히 보전한다는 뜻의 영보정은 화재로 손실된 뒤 2015년에 복원돼 최고 절경 정자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정자에서 바라본 오천항의 낙조를 보니 옛 선조들이 그토록 극찬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조선을 수호하던 충청수영성은 조선 말기 1896년(고종 33년)에 폐영되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건물 대부분이 사라졌지만, 선조들의 충성과 용맹은 여전히 이어 내려오고 있지 않을까.
아쉬움을 뒤로 하고 충청수영성의 명맥을 이어 오늘날 대한민국의 또다른 안보를 지키고 있는 다음 방문지로 이동했다.
충청수영성의 망화문
충청수영성 영보정
충청수영성에서 바라본 낙조
대한민국의 에너지 안보를 지키는 ‘보령LNG터미널’
낙조를 뒤로한 채 차로 5분가량 달리다 보니 저 멀리 어둠을 밝히는 수많은 불빛이 보인다. SK E&S와 GS에너지가 합작해 세운 ‘보령LNG터미널’이다. 해외에서 생산되는 LNG(액화천연가스)를 배에 실어와 저장하고 국내 주요 수요처에 송출하는 곳이다. 이곳을 통해 들어온 LNG는 주로 발전(發電, 전기 생산) 등의 용도로 사용된다.
2017년 1월 1일에 상업 운전을 시작한 ‘보령LNG터미널’은 국내 최대 규모 민간 LNG터미널이다. 부지만 총 약 58만㎡로 국제 규격의 축구장 90여 개에 준하는 규모다. 높이 약 50 미터로 약 20층 건물 높이의 거대한 LNG 저장탱크 6기가 위풍당당한 위용을 드러낸다. 둥그런 원기둥 형태의 저장탱크의 지름은 약 86미터, 1기당 저장 용량은 20만㎘에 달한다. 국내 유명 워터파크에서 사용되는 물이 약 1.5만㎘정도라고 하니, 저장탱크 하나에 워터파크 13개가 동시에 들어와 있는 셈이다.
집에서 요리를 할 때 보통 사용하는 가스가 바로 천연가스인데, 우리나라에 들여오는 천연가스는 LNG(Liquefied Natural Gas), 즉 천연가스를 영하 162도에서 액화시킨 형태이다. 기체 대비 부피가 600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기 때문에 운송과 보관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다만 운송과 보관시 액체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초저온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LNG 저장탱크는 하나하나가 거대한 보랭(保冷)병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LNG를 싣고 오가는 배가 정박할 수 있는 하역 부두도 있다. 마침 부두에는 미국에서 출발하여 한달 여 간의 여정을 마친 SK E&S의 LNG선 ‘프리즘 커리지(PRISM Courage)’호가 LNG 하역 작업을 진행 중에 있었다. 프리즘 커리지호의 총 선체 길이는 299m에 달한다. 영화로 익숙한 타이타닉호의 선체보다 더 큰 크기다. 프리즘 커리지호가 한 번에 운반하는 LNG는 최대 75,400톤이다.
SK E&S는 2019년 운항을 시작한 민간 최초 LNG선 1호선 ‘프리즘 어질리티(PRISM Agility)’부터 2호선 ‘프리즘 브릴리언스(PRISM Brilliance)’외에도 이번 보령에서 만난 3호선 ‘프리즘 커리지(PRISM Courage)’호, 얼마 전에 운항을 시작한 4호선 ‘프리즘 다이버시티(PRISM Diversity)’호까지 총 4대의 LNG 선단을 운영하고 있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는 LNG선들과 함께 미드스트림(Midstream)의 핵심인 보령LNG터미널은 SK E&S가 천연가스 개발과 운송, 저장 및 발전사업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LNG밸류체인(Value Chain)을 완성하는데 핵심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해가 지고 거대한 저장탱크와 LNG선에 불빛이 하나 둘씩 켜지면 낮과는 또 다른 진풍경이 펼쳐진다. 마치 SF 영화 속 우주처럼 반짝이는 별과 우주선을 떠올리게 하는 야간 풍경은 경이로움을 자아낸다. 이렇게 불을 밝히는 이유는 이곳이 국토의 경계선이기 때문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바다를 밝히는 등대처럼 안보의 최전선 보령LNG터미널은 매일 불을 밝히고 있다.
특히 불안한 국제정세로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보령LNG터미널은 에너지 수급의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나라를 지켰던 충청수영성처럼 보령LNG터미널 역시 우리나라의 에너지 안보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보령LNG터미널에 정박한 ‘프리즘 커리지’
보령LNG터미널의 LNG 저장탱크
보령LNG터미널의 야경
SK E&S의 LNG선 ‘프리즘 커리지’호와 터미널을 연결하는 파이프
다채로운 매력을 지닌 보령
푸른 바다를 품은 죽도와 대천해수욕장, 자연 그대로 깨끗하게 보존된 청정 수역 대천항과 충청수영성이 있는 곳, 보령. 보령은 생각보다 더욱 다채로운 매력을 지닌 곳이다. 이른 새벽에는 어촌의 풍경에서는 삶의 활기를 느낄 수 있고, 일몰 때는 낙조를 보며 차분하게 여유를 가질 수 있다. 또 하나, 서해안의 최전선으로 바다와 나라를 지켜온 보령의 모습은 이곳을 직접 여행해야만 알 수 있다.
현재의 우리와 미래의 후손들에게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을 수 없는 자연, 그리고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상기할 수 있는 곳, 보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