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ㅣ 곽재식 숭실사이버대 환경안전공학과 교수·작가
조선시대 초기로 시간 여행을 하는 SF 영화를 상상해 보자. 스마트폰 한 대만 가져 가면 조선시대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지식을 다 아는 척 할 수 있을테니 대단히 뛰어난 학자 행세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역사 기록을 검색해서 앞으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어떤 일이 펼쳐지는 지 볼 수도 있으니 미래를 내다 보는 예언자 행세를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이만하면 조선시대에서 존경 받으며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런 계획은 완전히 실패할 것이다. 조선시대에 스마트폰을 들고 온다고 해도 조선시대에는 와이파이가 없기 때문이다. 와이파이가 없을 뿐 아니라 인터넷망도 없고 그 인터넷망을 이용해 정보를 검색하게 해 줄 회사도 없다. 다행히 주인공이 간단한 백과사전 내용 정도는 전부 다운로드를 해 와서 꼭 인터넷에 접속하지 않아도 활용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고 해 보자. 이 정도면 모든 것을 다 아는 현자인 척 하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똑똑한 척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만, 그 조차도 오래 가지는 못한다. 몇 시간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나면 배터리 속의 전기가 다 닳을 것이다. 다시 충전하려고 해도 조선시대에 전기를 구할 방법이 없다.
이와 같이 많은 기술은 그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배경과 조건이 갖추어져 있어야 실제로 널리 활용될 수 있다. 흔히 인프라라고 말하는 간접자본이 갖추어져 있어야만 기술을 제대로 쓸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다. 조선시대에 자동차를 가져 가서 최고로 빠른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이나, 조선시대에 기관총을 들고 가서 그 나라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도 바로 간접자본, 배경이 되는 기술 때문에 발목이 잡힌다. 아무리 좋은 자동차가 있어도 휘발유를 구하지 못하면 달릴 수가 없고, 기관총도 탄약이 다 떨어지면 몽둥이만도 못한 무기가 된다.
기술과 그 기술의 배경이 될 수 있는 다른 기술과의 관계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넓게 뻗어 있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에 스마트폰을 들고 온 사람이 참다 못해 직접 전기를 만들어 보기로 결심했다고 해 보자. 초등학교 시절 방학 때 과일에 금속판을 꽂아서 전기를 만드는 실험을 해 본 적이 있는가? 그런 방법이라면 전기를 어렵잖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런 방식도 답이 되기는 어렵다. 금속판과 스마트폰을 연결할 전선을 구하는 것부터가 대단히 골치 아픈 일이기 때문이다. 21세기에야 세상에 널려 있는 게 전선이지만, 조선 초기 사회에서 구리를 녹여 그것을 가늘게 실처럼 뽑아 만든 전선이라는 도구를 어디서 쉽게 구할 수 있겠는가? 구리를 녹여 실처럼 뽑는 작업 자체도 아무나 쉽게 해낼 수 있는 쉬운 기술은 아니다.
세상을 바꾼다는 새로운 기술들도 마찬가지다. 화려한 신기술이 등장할 때 마다 그 기술이 정말로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해 주는 그 배경이 되는 기술, 간접자본이 같이 갖추어지는 일이 중요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연결된 기술의 범위는 넓다.
요즘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하는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도 마찬가지다.
기후변화와 관련된 기술이라고 하면 소비자 제품으로 얼른 쉽게 다가 오는 전기 자동차 같은 제품이나 정부와 지방 당국에서 광고하기에 좋은 태양광 발전, 풍력 발전 등이 가장 먼저 눈에 뜨일 것이다. 실제로 이런 기술은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중요한 방안이며 그 만큼 많은 관심과 투자를 받는 영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기 자동차는 충전을 하지 못하면 쓸모가 없다. 즉 전기 자동차가 잘 되기 위해서는 그만큼 충전을 할 수 있는 간접자본이 편리하고 저렴하게 널리 퍼져 있어야 한다. 충전기는 멋진 모습으로 화보에 등장하는 신형 전기 자동차보다는 눈에 덜 뜨이고 덜 화려해 보인다. 하지만 결국은 충전기야 말로 세상이 전기 자동차 세상으로 가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아주 중대한 문제다. 만약 휘발유를 넣을 수 있는 곳보다 전기 자동차를 충전하는 곳이 더 많아져서 오히려 휘발유 차에 주유하는 것이 더 불편하고 귀찮아진다면 자연스럽게 휘발유 자동차는 빠르게 사라지고 세상은 전기차로 뒤덮일 것이다.
전기 자동차 충전이라는 작업은 다시 다양한 다른 기술과 더 연결될 수 있다. 단순히 배터리에 빨리 전기를 집어 넣어 주는 것도 중요한 기술이지만, 전기를 활용하는 다양한 방법이 전기 자동차 충전에 보다 복합적으로 연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전기는 이미 집집마다 가전제품 사용을 위해 들어 와 있다. 그렇다면 가정의 전기를 이용해서 간편하고도 효율적으로 전기 자동차를 집에서 충전하는 방안을 생각해 보는 것은 당연하다. 가정의 전기와 쓰기 간편한 전기 자동차 충전 설비를 연결하고 가전제품을 덜 사용하는 시간 대에 집중적으로 전기를 몰아 주는 방식을 택한다면, 집에서 전기 자동차 충전을 상당히 효과적으로 해 낼 수 있다. 이런 기술은 전기 자동차에 필요한 간접자본을 대단히 두둑하게 얹어 주는 일이다. 내 집이 충전소 보다 더 효율적인 충전소로 변한다. 휘발유 자동차와 비교해 본다면 집집 마다 주유소가 있는 상황과 같다.
간접자본과 배경 기술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면, 아예 한 발 더 나아가서 전기 자동차를 반대로 활용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전기 자동차를 전기 써 없애는 장치가 아니라, 전기를 주는 장치로 활용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기후변화의 해결사로 가장 자주 등장하는 태양광과 풍력 발전은 햇빛이 없고 바람이 없을 때는 전기를 만들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밤이나 바람 없는 시간이 되었을 때에도 전기를 쓸 수 있도록 전기를 저장해 두는 장치를 어떻게든 마련해 두어야 한다.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배터리인데 배터리를 많이 구해 놓는다는 것도 고민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만약 충분한 간접자본만 확보되어 있다면, 바로 이럴 때, 집집마다 사람들이 갖고 있을 전기 자동차 배터리를 활용해 보자는 구상이 힘을 받을 수 있다. 길 위를 채우고 있는 전기 자동차들을 모두 거대한 움직이는 배터리로 보자는 것이다. 대개 자가용 자동차는 주차장에 세워 두는 시간이 워낙에 긴데, 그럴 때마다 남아 도는 전기를 자동차 속에 저장해 주고, 나중에 가정에서 전기가 필요하거나 옆집에서, 옆 마을에서 전기가 필요할 때 자동차 속의 전기를 꺼내 쓰도록 해 주면 된다.
이런 식으로 많은 사람들의 전기 자동차 속에 들어 있는 전기를 하나로 합쳐서 누구든 꼭 필요한 시간, 꼭 필요한 곳에 정확히 활용할 수 있다면 전기 자동차와 재생에너지 보급은 한층 더 편리해진다. 이런 상황이라면 전기 자동차는 충전 고민을 해야 하는 장치가 아니라 세상에 전기를 줄 수 있는 장치가 된다. 내 자동차는 그냥 소비 제품이 아니라 돈을 벌어 주는 생산 설비다.
최근 미국에서 개최된 CES 2023 전시 행사에서 살펴본 SK E&S의 전시물도 바로 이렇게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간접자본의 역할을 강조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효율적인 전기차 충전을 위한 가정, 건물의 전력 조절 방법으로 에버차지 EV 충전 설비가 소개되어 있었고, 내 자동차의 배터리를 재생에너지 전기 사용을 위한 배터리로 쓴다는 구상도 차량 대 전력망, 즉 vehicle to grid, V2G라는 이름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전시회장 전체를 둘러 보면 온갖 회사에서 가져다 놓은 각종 전기 자동차, 자율 주행 농기계, 인공지능과 메타버스 기술을 이용한 각종 영상 등등이 질릴 정도로 가득가득했다. 그런데 그 와는 방향이 약간 다른 배경기술에 대한 전시물들을 보고 있으니, “다 좋은데 도대체 그 많은 화려한 기계들을 이제 어떻게 돌리려고 하는데?”라는 질문에 답을 준다는 느낌이었다.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그 대응책이라고 하는 기술을 더 넓게 더 많은 사람들에게 퍼뜨려 줄 수 있는 기술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좀 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방향에서 기후변화에 대한 배경기술을 제시하는 전시물로는 수소 기술에 관한 내용도 눈에 뜨였다.
수소 기체는 탄소 원소가 들어 있지 않은 연료이므로 활용하는 중에는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수소 기체가 거저 아무데나 널려 있지는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장비를 동원해 수소 기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 어렵긴 하다. 그래도 흔히 그린 수소라고 부르는 재생에너지를 이용해서 수소를 만드는 방법도 있고 블루 수소라고 해서 다른 연료를 이용해서 수소를 만들어 내되 그 과정에서 그나마 최대한 이산화탄소가 나오지 않도록 줄여 가며 만드는 방법도 있다.
만약 전기가 충분하다면 그 전기를 배터리에 저장해 두는 대신에 그 전기로 수소를 만들어 수소 통에 담아 둔다고 생각해 보자. 전기를 수소로 저장해 둔 셈이다. 배터리에 직접 전기를 저장하는 방식에 비해 이런 방식을 택하면 더 가볍게 더 많은 양을 운반하기 편리하게 저장할 수 있다. 때문에 몇몇 지역에서는 적극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전기를 저장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제주도에는 많은 풍력발전기들이 설치 되어 있는데, 가끔 너무 바람이 많이 불고 그에 비해 전기를 너무 적게 쓸 때가 되면 전기가 지나치게 남아 돌아 오히려 전력망에 무리를 줄 때가 생긴다. 이럴 때 마다 남는 전기로 수소를 만들어 쌓아 두면 나중에 그 수소로 자동차를 움직이거나 난방에 사용할 수도 있고, 수소로 다시 전기를 만들거나 비행기를 띄우는 일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수소 기술의 고민거리도 결국은 간접자본, 배경기술과 관련한 기술의 연결과 관련이 깊다. 이렇게 만들어낸 수소가 유용해지려면 그만큼 수소를 이용해서 할 수 있는 도구와 장비들이 많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지금 수소차, 그러니까 수소연료전지 자동차는 한국과 일본 기업을 중심으로 보급되고 있는 추세이지만 앞으로 더 많은 사용처, 더 많은 용도가 생겨야 한다. 그래야 그만큼 수소를 만들고 유통하는 일도 성공할 수 있고, 그래야만 다시 언제 어디서나 쉽게 수소를 구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래야 수소를 이용하는 도구와 장비를 더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말해 보자면 수소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면 수소를 만들 이유가 없고, 수소가 별로 없다면 딱히 수소로 할 수 있는 일을 개발할 까닭이 없다.
이것은 마치 꽃이 있어야 나비가 꿀을 먹을 수 있고, 나비가 있어야 꽃은 씨를 맺을 수 있어 다시 꽃 필 수 있는 것과 같다. 어느 한 쪽이라도 없다면 양쪽이 같이 실패한다. 수소 기술을 꽃 피우게 하려면 양쪽의 기술을 동시에 키워 나가면서, 여러 기술들을 연결할 수 있는 구석구석의 기술들도 같이 키워 나가야 한다. CES 2023의 전시에서는 그냥 수소를 잘 만들어 낸다는 이야기를 넘어 서서, 수소로 공중에 드론을 띄우는 활용 기술도, 수소를 효과적으로 저장해 운반하기 위한 액화 설비 기술도 같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나의 화려한 제품이 눈길을 끄는 것 보다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산업의 변화를 위해서는 여러 기술, 여러 분야에 걸친 서로 연결된 행동이 필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하게 된다.
SK 전시관의 도입부에서는 SK가 앞으로 2억톤의 이산화탄소 감축량을 달성하겠다는 계획을 자신감 있게 보여 주고 있었다. 2억톤이면 전세계 이산화탄소 감축 목표량의 대략 1% 정도에 해당하는 양이다. 그것을 혼자서 하겠다는 이야기다.
몇 년 전이라면 이런 계획을 발표하는 것이 그저 착한 느낌을 주는 정도의 효과에 그쳤겠지만, 요즘은 기후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그대로 기업의 경쟁력이 되는 시대다. 금리가 높은 시기에는 부채가 적은 회사가 유리할 것이고, 환율이 높은 시기에는 수출 기업이 유리하다는 것처럼, 기후변화에 대한 대비가 충분히 되어 있는 기업은 앞으로 점점 더 심각해질 기후변화 문제의 시대에 그만큼 더 잘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2억톤이라는 수치는 부채 비율이나 수출 비중을 나타내는 숫자와 비슷하게 기술과 전략에 대한 자신감을 나타내는 숫자다.
과연 2억톤이라는 숫자를 계획대로 잘 달성할 수 있을까? 확실한 것은 그런 발표가 나올 정도로 기후변화 문제가 산업과 경제에서 중요해졌으며, 그 만큼 기후변화 문제에 대해 산업계 전체의 변화를 가져올 간접자본과 배경기술에 대한 투자도 중요해졌다는 점이다.
요즘 K팝 아이돌의 인기는 전세계에 걸쳐 높은 편이다. 그런데 화려한 K팝의 배경에는 옛날처럼 음반을 통해 음악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를 통해 음악을 즐기고 유행이 확산 되는 새로운 기술이 깔려 있다. 음반가게에 가서 LP 음반이나 CD를 돈을 주고 사서 듣던 시대, 외국에서는 낯선 극동 아시아 나라의 새로운 음악을 굳이 돈을 주면서까지 들어 보려는 사람은 드물었다. 간혹 그런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다고 해도 서로 팬들의 모임을 만든다거나 더 많은 자료를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알기는 어렵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가볍게 무료로 음악을 즐기고, 아무리 멀리 떨어진 사람들끼리도 감상을 교환할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상황은 완전히 변했다. 한번도 들어 보지 못한 한국이라는 나라의 음악이라도 한 번 쯤은 재미 삼아 들어 볼 수 있고, 그렇게 한번 들어 보고 좋은 것 같으면 “이 아이돌 노래가 세상에서 제일 좋지 않냐”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모임에도 얼마든지 참가할 수 있는 세상이 온 것이다.
바로 이런 기회를 타고 K팝은 성공했다. 동시에 인터넷 동영상을 공유하는 IT 기업들은 바로 그런 K팝의 인기 때문에 계속해서 많은 시청자와 구독자를 모으며 성장할 수 있다. 양쪽이 서로가 서로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며, 음악을 바꾸고 대중 문화와 세계 청소년들의 생각을 바꾸고 있다.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세상의 노력도 결국은 비슷한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CES 2023에서 선보인 사회간접자본이 되어야 하는 다양한 기술들은 미래 사회의 춤을 밑에서 떠받칠 무대가 되는 기술이라고도 말해 볼 수 있을 것이다.